
각운(脚韻, rhyme, 시의 행 끝에 cloud와 crowd, hills와 daffodils처럼 같은 음의 단어를 배치해 리듬감을 살리는 영시의 한 특징)이 오롯이 살아 있는 ‘수선화(Daffodils)’라는 제목의 이 시에서 우리의 삶은 덧없고 외로운 방랑의 길이고 수선화는 나그네의 지친 심신을 달래주는 위로의 꽃이다.
아마도 제주의 수선화를 가장 사랑하고 귀히 여겼던 이는 추사(秋史) 김정희 였을 것이다. 추사는 제주 유배지에서 처음 본 수선화에 반해 그 꽃을 찬(讚)하는 스물세 수(首)의 시를 남겼다. ‘一點冬心朶朶圓 (한 점 겨울 마음 송이송이 둥글고) / 品於幽淡冷儁邊 (그 기품 그윽하고 맑아 차갑게 빼어났네) / 梅高猶未離庭砌 (매화가 귀하다지만 뜰을 떠나지 못하는데) / 淸水眞看解脫仙 (맑은 물 위에 참으로 해탈한 신선을 보네)’
제주의 농부들이 아무렇게나 캐서 버리거나 말 먹이로 쓰는 그 꽃을 가져다가 분에 고이 심어 창가에 놓아두고 추사는 그 향기와 자태에서 해탈한 신선을 보았던 것이다. 꽃가루를 옮기는 벌 나비가 없는 음력 정월 그믐께부터 피기 시작하는 그 꽃은 그래서 그 향기가 더욱 그윽하고 진하다. 마치 난초와 같이 고졸(古拙)한 잎들이 먼저 나고 가느다란 젓가락 같은 꽃대가 올라와 네댓 개의 꽃들이 피어난다. 하얀 꽃받침에 노란 황금빛 꽃술이 자리 잡은 모양에서 은 쟁반에 놓인 금 잔(盞) 같다고 하여 금잔옥대(金盞玉臺)로 불리기도 하는 그 꽃들은 피어나자마자 다소곳이 고개를 숙인다. 그 모양에서 나르시스의 전설이 생겨났을 것이다. 천하의 미남자 목동이었던 나르시스는 자신을 쫓아다니는 요정(妖精) 에코의 사랑을 받아주지 않은 벌로 샘물에 비친 자신의 아름다운 얼굴을 사랑해 그걸 바라보느라 물가를 떠나지 못한다. 허구한 날 고개를 떨어뜨리고 처연하게 물만 바라보다가 그가 죽은 자리에서 수선화가 피어났다는 것이다. 그가 그렇게 물가를 떠나지 못했던 것은 자신의 모습을 사랑했기 때문이 아니라 외로워서가 아니었을까? 무릇 사람은 사랑해주는 이가 없어서 외로운 게 아니라 남을 사랑하지 못해서 외로운 것이다.
‘울지 마라 / 외로우니까 사람이다’로 시작하는 정호승의 시 ‘수선화에게’에서는 나뭇가지에 앉은 새도 외롭고 산 그림자도 외롭고 하느님도 외롭고 종소리마저 외로워서 울려 퍼진다.
누군가가 떠나가고 있는 길섶이나,
나그네의 지친 유랑의 발길에나,
중섭 공원의 어슴푸레한 박명(薄明) 속이나,
추사가 유배했던 서귀포 대정읍의 현무암 돌담 아래나,
어느 호젓한 물가에
지금 수선화가 외롭게 피어 있을 것이다. <출처: 블로그 수선화에게 / 최대봉의 낭만수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