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민우의 브랜딩 에세이] 5…똑같은 산세리프는 가라
[강민우의 브랜딩 에세이] 5…똑같은 산세리프는 가라
  • 강민우 크리에이터
  • 승인 2026.10.18 00:1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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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블랜디드'의 종말과 네오 헤리티지의 부활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글로벌 명품 패션쇼장이나 테크 기업들의 발표회장에는 기이한 현상이 벌어졌다. 버버리®, 발렌시아가®, 입생로랑®, 루이비통® 등 수십 년에서 수백 년의 역사를 지닌 거대 브랜드들이 너도나도 기존의 독창적인 로고를 버리고, 똑같은 굵은 검은색 산세리프(Sans-serif, 글자 끝의 돌기가 없는 폰트) 텍스트로 로고를 바꿔버린 것이다.

모바일 화면에서의 가독성과 디지털 최적화, 그리고 '미니멀리즘'이라는 명목하에 벌어진 이 현상을 글로벌 브랜딩 씬에서는 '블랜디드(Blandification, 무색무취화)'라고 불렀다. 그러나 트렌드를 무작정 좇아 로고를 단순화한 결과는 참혹했다. 멀리서 보면 브랜드 구별조차 불가능해졌고, 브랜드가 수십 년간 쌓아온 고유한 '성격과 영혼'은 잘 깎아놓은 껍데기 뒤로 증발해 버렸다.

■ 획일화의 덫을 깨부수는 '네오 헤리티지(Neo-Heritage)'의 반격

최근 시장에서 승리하는 위대한 브랜드들은 이 획일화의 덫을 깨닫고 전혀 다른 방향으로 핸들을 돌리기 시작했다. 남들을 따라 하는 유행을 버리고, 자신들만이 가진 가장 강력한 무기인 '역사적 자산과 철학'을 복원하는 '네오 헤리티지(Neo-Heritage)' 리브랜딩에 나선 것이다.

버버리®(Burberry®): 밋밋함에서 고풍스러운 역사의 부활로

버버리 마크 변천사/사진=logo1000
버버리® 마크 변천사/사진=logo1000

버버리®는 2018년 트렌드에 맞춰 밋밋한 검은색 텍스트 로고로 전환했으나 "버버리 고유의 영국적 클래식함이 사라졌다"는 혹평을 받았다. 결국 2023년, 버버리는 100년이 넘는 역사를 지닌 고풍스러운 세리프 폰트와 브랜드의 상징이었던 '말 탄 기사(Equestrian Knight)' 문양을 전면 복원했다. 껍데기 미니멀리즘을 버리고 정체성을 되찾자 시장은 즉각 열광했다.

푸조®(Peugeot®): 전성기 방패 문양으로 되찾은 브랜드 자존심

푸조 마크 변천사/사진=logo1000
푸조® 마크 변천사/사진=logo1000

자동차 시장의 로고 단순화 열풍 속에서 푸조는 2021년, 1960년대 자사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방패 모양의 사자 얼굴 로고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해 선뵈었다. 흔한 크롬 입체 사자 형상을 버리고 역사적 뿌리를 드러냄으로써, 경쟁 모빌리티 브랜드들과 확실하게 차별화되는 고풍스러운 품격을 확보했다.

버거킹®(Burger King®): 70년대 클래식 빵 속으로 들어간 따뜻한 서사

버거킹® 마크 변천사/사진=강민우 크리에이터

버거킹®은 20여 년간 유지하던 차가운 파란색 테두리의 입체 로고를 던져버리고, 1970~80년대 사용하던 둥글둥글하고 따뜻한 버거 모양의 클래식 로고로 돌아갔다. 인공적인 느낌을 지우고 복고풍의 정감 어린 비주얼 시스템을 도입하자, 단순 패스트푸드가 아닌 '진정성 있는 수제버거'의 브랜드 이미지를 완성할 수 있었다.

■ 껍데기 트렌드를 넘어 경쟁사가 베낄 수 없는 '영혼'을 정립하라

이들의 리브랜딩이 주는 메시지는 명확하다. 단순히 예쁘고 세련된 디자인, 남들이 다 하는 트렌디한 비주얼을 따라 하는 것은 브랜드의 수명을 갉아먹는 독이 된다. 로고와 디자인은 단순한 시각적 껍데기가 아니라, 브랜드 내부에 숨 쉬는 영혼과 성격을 고객에게 정확히 전달하는 '최전선의 언어'여야 한다.

쉐어멜론 김용재 대표는 "트렌드를 맹목적으로 따르는 디자인은 유효기간이 짧지만, 브랜드의 영혼에서 출발한 디자인은 결코 시들지 않는 생명력을 가집니다. 남들의 껍데기를 베끼는 미니멀리즘에서 벗어나, 경쟁사가 결코 베낄 수 없는 고유한 소울과 서사를 시각 언어로 구현할 때 비로소 브랜드는 시대와 세대를 뛰어넘어 살아남게 됩니다"라고 강조한다.

디지털 화면에서 잘 보인다는 이유로 고유의 아이덴티티를 지워버린 브랜드들은 고객에게 아무런 감정적 애착을 심어주지 못한다. 반면, 자신의 역사와 미션, 비전이라는 단단한 영혼을 시각 언어로 번역해 낸 브랜드들은 대체 불가능한 팬덤을 형성한다. 블랜디드의 종말은 우리에게 브랜드의 진짜 본질이 어디에 있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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