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16일(양력)은 해월(海月) 최시형 선생이 이 땅에 오신 지 199주 년이 되는 날이다. 1827년 경주에서 태어난 그는 평생을 ‘최보따리’로 살며 전국을 누볐지만, 그 발길이 가장 깊게 머물고 동학의 뿌리가 단단히 내려진 곳은 단연 강원도였다. 강원도의 험준한 산세와 순박한 민초들이 없었다면 오늘날 우리가 아는 동학의 거대한 정신은 온전히 보존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인제 갑둔리는 단순히 몸을 숨긴 피난처가 아니라, 외부의 압박으로부터 사유의 독립성을 확보한 '철학적 숙성의 공간'이었다. 이곳에서 이루어진 『동경대전』의 간행은 단순한 출판을 넘어, 혼란한 시대 속에서 인간 존재의 본질과 하늘(우주)의 원리를 논리적으로 구조화한 이론적 정립의 과정이었다. 첩첩산중의 고립은 오히려 보편적 진리에 다가가기 위한 치열한 자기 성찰의 요람이 되었다.
원주를 중심으로 한 활동은 관념 속에 머물던 철학을 민중의 구체적인 삶 속으로 끌어내린 사건이었다. 선생은 지식이나 위계가 아닌,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 맺음을 통해 철학을 전파했다. 이는 동학을 박제된 교리가 아닌, 억압받는 민중들이 자신의 주체성을 깨닫게 하는 실천적 인문주의이자 정신운동으로 승화시킨 과정이었으며, 원주에서의 체포와 순교는 한 철학자가 자신이 지켜온 신념과 삶의 터전을 분리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실존적 결단이다. 선생에게 강원도는 지리적 공간을 넘어 자신의 철학적 가치가 탄생하고 검증되며 완성된 '사유의 영토'였다. 결국 강원도의 산천에 남겨진 선생의 발자취는 특정 종교의 성지를 넘어, 인간의 존엄과 평등을 향한 한국 근대 철학의 발원지이자 정신적 고향으로서의 가치를 지닌다. 이는 시대를 초월해 인간이 어떻게 자신의 신념을 삶으로 증명해내는지를 보여주는 준엄한 기록이며, 한국 정신사의 본향이 되어야 함을 웅변한다.
오늘날 대한민국은 경제적 선진국이 되었으나 타인에 대한 혐오와 생명 경시라는 인성적 위기에 직면해 있다. 이러한 때에 해월이 강원도에서 설파한 ‘사인여천(事人如天)’의 가르침은 더욱 절실하다. “사람 대하기를 하늘같이 하라”는 가르침은 오늘날의 갑질 문화와 갈등을 치유할 유일한 열쇠다. 가장 낮은 곳의 민초들을 하늘로 받들었던 선생의 정신은 우리 사회가 지향해야 할 ‘인격적 선진국’의 명확한 설계도이기도 하다.
더 나아가 해월은 인간을 넘어 만물로 자비의 지평을 넓혔다. ‘인시천(人是天)’의 원리에 따라 밥 한 그릇에서도 우주의 노고를 읽고, 나무 한 그릇도 함부로 꺾지 말라고 가르쳤다. 기후 위기 시대에 모든 생명을 경건하게 대했던 그의 생명 존중 철학은 시대를 앞서간 생태적 지혜였다.
이제 우리는 강원도의 산하에 스며든 해월의 정신을 되새겨야 한다. 인격적 선진국이란 화려한 겉모습이 아니라, 서로를 하늘처럼 예우하는 품격 있는 마음에서 시작된다. 선생의 보따리에 담겼던 그 거룩한 뜻이 21세기 대한민국의 인성적 토양으로 부활하길 염원한다. 강원도에서 피어난 동학의 불꽃이 온 나라를 비추는 등불이 되어, 물질의 풍요를 넘어 마음의 풍요가 흐르는 인격 강국으로 나아가는 길. 그것이 199년 전 이 땅에 오신 선생이 우리에게 전하는 진정한 유산이자 시대적 소명이다

